순결한 영혼을 소유한 '별의 시인' 윤동주
어두운 시대 현실에서 시를 쓴다는 건 어쩌면 작은 ‘등불’ 하나를 밝혀서 거는 일이다. 모국어 사용 금지와 창씨개명創氏改名, 신사참배와 징병제 등으로 식민지 피지배의 ‘어둠’이 깊어갈 무렵, ‘등불을 밝혀’ 어둠을 물리치고 ‘아침을 기다리는’ 시인이 있었다. 나아갈 길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어둠 속에서 언젠가 홀연히 닥칠 ‘아침’을 기다리던 그가 바로 윤동주(尹東柱, 1917~1945)다.
윤동주는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개신교 집안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동촌은 외숙부 김약연와 김하규, 문병규 등이 140명의 식솔을 이끌고 이주하여 개척한 척박한 땅이었다.
'동방을 밝히는 곳'이라는 뜻의 명동촌(明東村)은 윤동주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공간이었다.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어린 시절 외숙부 김약연 목사의 일제 저항의식을 배울 수 있었고, 통일 운동가이자 민족주의자인 문익환 목사 또한 명동촌에서 윤동주와 함께 자라며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낼 수 있었다. 또, 명동촌은 훗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앞두고 사격 연습을 하며 마음을 정리하던 장소라고도 전해진다.
윤동주의 삶에서 본격적으로 문학이 시작된 시기는 그가 1938년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한 이후였다. 연희전문에서 배운 우리의 역사와 영문학 강의 등을 통해 우리말에 대한 자부심과 문학에 대한 꿈을 키운 윤동주는 정지용, 김영랑, 백석, 이상 등 당대 최고의 시인들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도스토예프스키, 앙드레 지드, 발레리 등 외국 문학에도 폭넓은 관심을 보였다.
이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틈틈이 썼던 시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을 걱정하는 주위의 만류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후배 정병욱에게 원고를 건네고 일본 유학을 준비한다.
1942년 3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윤동주는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하게 된 것을 일생의 부끄러움을 느끼며 이를 늘 회고하고, 고통과 참담한 비애를 시로 썼다. 그 회고가 지금은 너무나도 유명한 「참회록」이다. 윤동주는 항일 정신의 시를 쓰면서도, 굽히지 않는 애국심을 늘 숨기지 않는 시인이었다.
그로 인해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감옥에서 비통한 죽음을 맞이하여 고향의 교회 묘지에 묻히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의는 겨우 스물여덟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윤동주' 하면 일반적으로 시인의 이름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는 엄연한 민족 지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직접적인 무장 투쟁은 없었지만, 뜻을 굽히지 않은 저항시와 삶의 고뇌에 대한 시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끝까지 놓으려 하지 않았다. 2010년 세상에 공개된 윤동주 재판의 문서를 보면 윤동주는 악명높았던 특별 고등경찰 앞에서도, 일제 재판관 앞에서도 절대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내성적인 시인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형사 앞에서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과 대책을 열정적으로 토로하기를 마다하지 않은 독립투사였다. 윤동주는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구체적인 운동 방침을 논의했다는 사실도 적시되어 있으며, 이는 윤동주가 비로소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다 간 시인으로 빛나는 이유이기도 하다.¹
위 내용은 《윤동주 문학관 순결한 영혼을 소유한 ‘별의 시인’ 윤동주》의 내용을 일부 재구성하여 편집하였음을 알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