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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저리 이야기
세저리 고스톱의 법칙: 진시황의 탄생
- 박다영
- 조회 : 3460
- 등록일 : 2014-01-06
지난 달 25일 새벽 2시 경, 문제의 인물 ooo때문에 두 명이 피박, 광박을 쓴 상황. ⓒ 허정윤
그들이 조은원룸 206호에 모인 이유는 단순했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홀로 보내고 싶진 않다. 이성제의 ‘농민신문’ 합격을 축하하는 자리도 겸했다. 세저리 답지 않은 레드, 화이트 와인, 크래커, 바나나, 크림치즈가 조합된 까나페 등을 이성제가 제공한 덕분에 모두들 호사로운 밤을. 물론 주 메뉴는 배를 든든하게 채워줄 삼성통닭과 불족발이었지만. 약 40분 가량의 씸(...)고, 뜯고, 즐기는 시간이 끝나자 말이 사라졌다. 잠자는 시간 빼고 종일 얼굴 맞대는 이들끼리 무슨 대화를 더 해야 하나. 그것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궁금하지도 않은 진실게임이라도 해야 하냐’는 최악의 제안이 나오던 그때, 류대현이 제안했다. “고스톱 칠래?”, “콜!!!!!” 한 명은 뛰어나가 고스톱을 사고, 한 명은 패가 찰지게 붙을 깔개를 준비하고 누군가는 공간 확보를 위해 남은 음식을 먹어 치우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게임이 시작되면 어둠의 심연에 잠들어 있던 인간의 본성이 눈을 뜰 것이라는 사실을. 서로의 고스톱 실력을 물으며 가볍게 시작했던 게임, 그러나 그 속에도 약육강식의 법칙은 엄연히 존재했고 천하를 제패한 ‘제왕’도 탄생했다.
*참고 자료: ‘고스톱 칠 줄 아냐’는 질문에 8명의 플레이어들은 세 가지 대답으로 갈렸다. 1)자주 친다 2)칠 줄 안다 3)못 친다. 여기서 1)번은 사실 고스톱 치는 횟수보다는 ‘나 잘치지롱’ 식의 실력 어필이다. 또래보다는 50대 이상의 플레이어들과 겨룬 경험이 있고 플레이에 큰 기복이 없다. 적어도 고박과 피박은 면한다. 3)번은 진짜 못 치는 경우다. 명절에 엄마, 아빠 뒤에 앉아 있다가 동전을 받아 과자 사먹는 즐거움에 만족하는 사람들이며 ‘같은 그림 찾기’같이 누가 봐도 짝이 되는 패만 골라 먹는다. 어쩌다 대박 나는 건 그건 ‘진짜 어쩌다 한 번 있는 일’이다. 여기서 놓치지 않아야 하는 사람은 2)번이다. ‘칠 줄 안다’가 ‘방법만 안다’인지 ‘(제대로) 놀 줄 안다’인지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상대에게 패를 읽히지 않기 위해 초반에는 못하는 척 발톱을 숨기기도 해 사실은 1)번보다 더 좋은 기량을 가진 플레이어인 경우가 있다.
하나. 판을 흔든 자만이 제왕이 된다
“어? 이거 한 장 더 있는데?”
“진짜?!!!!!!”
“게임 무효야, 무효!!!!!!”
(불과 30분 전)
류, 보람, 기석, 허윤이 가세한 고스톱은 9라운드째 계속됐다. 여기까지 게임을 지배한 자는 류. 그는 500원, 300원씩 야금야금 먹다가 3라운드에서 보람과 정윤에게 고박, 피박을 씌우며 각각 2400원을 따내는 쾌거를 얻었다. 이제까지 플레이만 놓고 보면 분명한 류의 압승이었다. 기석은 초반부터 광만 팔며 100원씩 따는 정도였고 보람은 헐떡이며 숨만 쉬고 있었다. 애초 ‘할머니와 자주 친다’는 발언으로 류와 투톱 형국이 예상됐던 허윤은 기세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류의 ‘고’를 저지할 사람은 없어 보였다. 4명의 플레이어 사이에서는 그랬다. 만약 그때 그 외침이 없었더라면.
“어? 이거 한 장 더 있는데? 원래 6장 까는 거 아니야?” 조용히 플레이를 지켜보던 진의 한 마디. 류가 바닥에 깔아야 하는 패를 7장으로 착각한 것. 기세 등등하던 류에게 찬 물을 끼얹은 강한 한 방이었다. ‘사기’라는 플레이어들의 술렁임이 계속됐고 보람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판 무효’를 외쳤다. 류에게 2800원 빚진 허윤도 이 때다 싶어 가세했다. ‘딱, 딱’ 화투장 내리치는 소리만 들리던 206호에 대선무효 버금가는 ‘무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선 무효에) 모르쇠로 일관하는 여왕님과 달리 류는 (어울리지 않게) 순순히 인정했다. “이제까지 판은 무효로 한다” 류의 독식을 막고, 판을 뒤흔든 진은 그 공을 인정받아 자연스럽게 새 플레이어가 됐다. 진의 추종자(사실은 푸드 메이트) 성제도 슬그머니 끼여 들었고 대신 ‘무효’로 잃은 것 없는 허윤은 ‘이쪽 사람들과는 합이 맞지 않아 앞으로도 잃게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인지 조용히 물러났다.
둘, 소리 없이 강하다
앞서 ‘칠 줄 안다’는 참고자료를 제시한 것은 모두 진, 그의 ‘필승법’을 읽어내기 위해서다. ‘잘 치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을 때마다 그녀는 “잘 못친다”고 답했다. 새롭게 합류한 성제에게서 1400원을 따는 것을 시작으로 진은 판을 장악해갔다. 류의 최고기록 2400원을 2라운드만에 넘어섰다. 2400원, 3000원, 3600원… 그의 진가는 3라운드였다. 진은 ‘1GO’를 외쳤다. 그리고 뜬금없이 패를 잘못 내는 실수를 범한다. 나머지 두 명의 플레이어는 "지금이 기회"라며 눈이 반짝. 그러나 진은 무너지지 않았다. 실수를 넘어서는 ‘따먹기’ 신공으로 7점으로 종료. 이후에는 고박, 피박 투 펀치를 기석에게 날려 한 번에 4800원 따기도 했다.
그는 절대 허둥거리지 않는다. 큰 돈을 따도 환호하는 법이 없다. 자신에게 유리한 패가 나와도, 싹쓸이와 쪽을 해도, 쓰리 고를 외칠 때도 시종일관 차분했다. 그는 소리 없이 강한 "레간자"였다. 아마도 레간자 진은 초반 9라운드의 플레이를 통해 개개인의 역량을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초단을 좋아하는지 고도리를 좋아하는지 혹은 광(光) 수집에 심취한 자인지. 전체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능력만으로 이미 그는 류를 넘어섰다.
한편 보람, 기석, 성제가 떡실신한 가운데 이 광경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한 명은 레간자 진 등장과 함께 게임에서 빠져, 손해를 전혀 보지 않은 허윤, 다른 이는 ‘진짜 상대를 만났다’는 듯 (많은 페북커들의 밤잠을 설치게 했던) 셀카 속 미소를 짓던 류였다.
셋. 천하통일, 진시황의 세상
6국을 합병하고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처럼 레간자 진은 고스톱 판을 통일하기 시작했다. 류는 그가 자주 하는 표현처럼 ‘기가 찬’ 플레이어에 반해 다시 판에 뛰어들었지만, 레간자 진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가끔 600원, 900원씩 따긴 했지만, 4800원을 한번에 집어 삼키는 레간자 진의 통 큰 플레이 앞에서는 그저 "깨갱". 류는 분명 ‘잘 하는’ 플레이어다. 상대가 가진 패도 읽을 줄 알고 과감하게 투고, 쓰리고를 외치는 간 큰 사나이다. 그런데 결과는 쪽박이다. 쓰리고를 외치고 받은 것은 달랑 300원. “실력만큼 실속을 챙기지 못한다”는 평가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흘러 나왔다.
그리고 류는 처음과 달리 상황이 불만스러워졌다.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레간자 진의 플레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류는 대표적인 입 터는’ 플레이어다. 머리와 덩치만큼이나 목소리가 크고 리액션도 뛰어나다. 화투장을 내려치는 소리도 가장 경쾌하다. 여기에 큰 리액션 없이 소리없이 강한 레간자 진은 류와 상극일 수밖에. 만약 레간자 진이 돈을 잃을 때마다 소리 지르거나, 중요한 패를 낼 때 손이라도 떨었다면 류는 ‘셀카 미소’를 지으며 승부심을 불태웠겠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결국 류는 "진세상"을 뒤엎지 못했다.
류 외에도 그녀에게 대항한 플레이어들은 있었다. 15라운드, 레간자 진은 원고, 투고를 외쳤다. 보람, 성제 중 진을 막을 사람은 없었다. 그 중 성제는 피가 하나도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 그는 피박을 면하기 위해 ‘피 안 먹기’ 작전에 돌입했다. 어디 말처럼 쉬운가. ‘어떻게 피를 하나도 안 먹어!’라고 모두가 생각했지만 그는 레간자 진이 쓰리고를 외치는 동안 단 하나의 피도 먹지 않았다. (레알) 단 하나도! 결국 30점, 3000원을 내줘야 했지만, 피박으로 "6000원"을 내야 했던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 진을 무너뜨리진 못했지만 끝까지 방어한 그에게 박수를.
‘방어’ 대신 ‘협상’을 내건 플레이어도 있었다.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기석. 크게 잃지도 크게 따지도 않던 그는 23라운드째가 되자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의 심기를 눈치챘는지 레간자 진이 성경같은 말씀을 내렸으니. “우리 아빠가 말하길 고스톱 칠 때 화장실 앞에 앉는 거 아니랬어” 그런데 기석은 줄곧 화장실 앞에 앉아있던게 아닌가. 마치 거북점이라도 치듯 기석은 ‘자리’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왠지 좋은 기운을 뿜어내는 자리에 앉은 듯한 레간자 진에게 자리 바꾸기를 권유했고, 진도 쿨하게 승낙했다. 결과는? 화장실에서 나오는 흑기(黑氣)까지 흡수한 레간자 진은 기석에게서 6400원을 뜯어내며 ‘끝판왕’으로 등극한다. 결국 그녀를 넘어서는 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모두 투항했다. 조용히 플레이어의 성향을 분석하고,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판을 쥐고 흔든 그녀를 누가 이긴단 말인가. 레간자 진을 무너뜨릴 ‘유방’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플레이어들의 생존법 및 얼키고설킨 관계도]
*순서는 순위와 무관하지 않음, 그러나 몇몇 플레이어는 성향을 비교하기 위해 붙인 경우도 있음
1. 진희정: 소리없이 강한 레간자. 묵묵히 점수를 따는 모습에 류는 끊임없이 경계함. 결국 “아까는 못한다더니, 가씨나!”라며 진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에 이름. 초반 ‘칠 줄만 안다’는 발언으로 경계 대상이 되지 않았고 결국 천천히 발톱을 드러내 ‘끝판왕’으로 등극. 돈을 딸 때마다 환호하거나, 다른 플레이어들을 조롱하는 등 열받게 하는 플레이를 자제한 덕에 비난을 받지 않음. (류의 ‘가씨나’ 발언이 있었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날 속이더니 너 정말 대단하구나’ 정도의 칭찬으로 보임) 화려하지 않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조용히 플레이하는 스타일로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함.
2. 류대현: 서울에 10년 살았는데도 고쳐지지 않는(혹은 고치지 않는) 걸걸한 경상도 사투리로 분위기 장악력이 뛰어남. 초반 ‘고스톱’을 기획한 것도 이 사람. 친구들과 바다 보러 부산 해운대구 누리마루(2005년 APEC 정상회담이 열렸던 곳으로 동백섬을 따라 정자가 많음)에 갔다가 바다는 안보고 정자에서 종일 고스톱 친 경력이 있음. 잘못된 룰로 ‘무효’를 외치자 의외로 순순히 승복한 "나름" 신의 있는 플레이어. 만약 진희정보다 외향적이고 화려한 플레이를 하는 상대가 있었다면 불타는 의지로 해가 뜰 때까지 플레이했을 것.
3. 이보람: 알고 보면 룰 메이커. 잃은 돈은2만원 가까이, 잃은 돈은 5천원 남짓. 그러나 게임 재미를 위해선 5만원도 잃을 자신이 있다는 정도의 패기. 한번도 빠지지 않고 ‘판이 깨지지 않도록’ 분위기를 유도하는 등 가장 플레이를 즐김. 한 마디로 ‘못 먹어도 고!’ 만약 이 사람이 없었더라면 다른 플레이어들이 돈 따는 재미가 없었을 것(…) *돈 계산 중. 방심하지 마세요(…)
4. 허정윤: ‘컴퓨터와 자주 고스톱 친다’며 초반 강한 면모를 보였지만 그는 앞서 설명한 전형적인 1)번 플레이어. 컴투스, 넷마블과 겨룬 경력을 무기 삼아 적극적으로 플레이에 나섰지만 결국 1등은 하지 못하고 2등에 자주 머무름. 고박, 피박은 면했으나 1등 아니면 승자가 될 수 없는 고스톱 세계에서는 약자일 수 밖에. 이후 승현의 ‘그림자’가 되어 그를 잘 조종하는 듯 했으나 한 박자 늦은 승현의 플레이 스타일에 두 손 두 발 들게 됨.
5. 박기석: 광팔이. OK캐쉬백처럼 진희정이 돈을 차곡차곡 따는 사이, 광 팔아 100원, 200원을 겨우 땄음. 진희정은 광을 팔아도 300원씩 버는데 그런 행운이 그에게는 오지 않음(불운의 아이콘, 졸업 전에 넘기고 갑니다) 이겨서 딴 돈보다 광 팔아 번 돈이 더 많음. 그렇다고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번 건 아니고(....) 화장실 앞 나쁜 기운 때문이라고 항변해봤지만 결국 실력이 탄로났고 스스로도 “내가 못하는 것 같아”라고 인정함.
6. 이성제: 그가 못하는 종목이 있다면 바로 고스톱. 그냥 못함. 경력도 노하우도 부족. 그러나 진희정이 쓰리고를 외치는 동안 피를 하나도 먹지 않고 피박 공격을 막아낸 것을 보면 가능성은 있어 보임. 평소 못하는 분야도 꾸준한 연습을 통해 기술을 익히는 스타일이니 고스톱도 연습하면 가능할 것으로 보임. (농민신문 연수에 챙겨가는 건 어떤지?)
7. 이승현: 충청도식 고스톱의 정석. 원하는 패를 쥐거나, 싼걸 먹을 때마다 그녀는 ‘아!’라는 기쁨의 감탄사를 내뱉음. 다른 플레이어들은 “이제는 그녀가 진짜 기쁜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함. 뒤늦게 뛰어들었지만, 처음부터 달린 이보람이 잃은 돈과 비슷한 수준에 이름. 그림자였던 허윤의 코치에도 불구하고 내야 할 패를 제때 내지 않는 실수도 연발. “왜 이 패를 안 낸 거야?”라고 물으면 “그러게… 몰랐어”라고 대답하기도.
*진나라의 영광은 계속될 것인가?
**아직 플레이 경험이 없는 손지은, 임온유은 "유방"이 될 수 있을까? 사전조사 결과, 손지은 "못 친다"라고 답했고(진짜 못 칠듯...) 임온유 "칠줄 안다"고 말하는 동시에 신나서 방방 뛰었음. 만약 실제로 "잘 친다"면 진희정과는 정반대 플레이를 펼칠 것으로 예상. 그렇다면 류대현의 승부욕이 불타오르지 않을까.
***내년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만나지 않기로 했음. 혹시 모르니 레간자 진이 대표로 "오늘 모인 이들에게 연락은 해보기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