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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저리 이야기
[뉴스&발행인편지] 철들자 장가 드네
- 관리자
- 조회 : 9058
- 등록일 : 2014-04-09
2기의 분위기 메이커이자 <세저리뉴스> 초대 발행인이고 국제신문 기자인 김화영이 장가 간답니다. 내게 보내온 사신을 이렇게 공개하는 게 선생의 도리는 아니겠지만 결혼식을 널리 알리고 철들어가는 과정도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성싶어 허락없이 싣습니다. "저작권 침해 불사"는 그가 창간한 <세저리뉴스>의 사시 중 하나이니 스스로 항의는 못 할 겁니다.
지금 6기생 "새벽별 스터디룸"을 2기생이 썼는데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거의 다 취업하고 떠난 방에서 기브스까지 하고 남아있는 화영의 모습이 참 안쓰럽더군요. 그래도 창가에 있던 자기 자리를 입구 구석으로 옮겨 면벽하더니 구호도 무식하게 "공부하자"라고 써붙인 뒤 최후까지 최선을 다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결국 졸업과 동시에 국제신문에 합격했지요.
회한으로 남은 순간은 기브스 한 그가 원주MBC 시험 치러 갈 때였습니다. 속으로 내가 운전해서 데려다주고 기다렸다가 데려올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그날 따라 폭설이 내리고 있어 스노우타이어도 없는 내 차로 가기엔 위험하고 칼럼마저 겹쳐, 택시 타고 가라 했던 게 지금도 마음에 걸립니다.
이번 벚꽃축제에 누구보다도 오고 싶을 화영이 못 온다니 아쉽네요. 학교 축제에 냉담한 졸업생들에게는 앙갚음으로 지네 축제(결혼식)에도 가지 말까 하는 옹졸한 생각도 하는 중인데 화영에겐 지난번 행사에 참석한 성의를 봐서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졸업생들도 웬만하면 오는 게 신상에 좋을 겁니다. 데이트 약속이 있다면 그날 제천으로 함께 오세요. 결혼하거나 사실혼 관계에 있는 졸업생도 함께 오는 거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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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샘께,
서른을 며칠 앞둔 2010년 12월이었어요.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그때 발가락 뼈가 3개나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었었죠. 고향 경주로 갔어야 하는 게 당연했지만 무슨 오기일까, 어디든 합격하지 않으면 제천을 떠나지 않기로 하고 방학 후에도 문화관에서 지냈습니다. 물 떠주고 잔심부름 해주던 친구들마저 모두 떠나고 나니 어찌나 외롭던지. 그래도 소파 두 개 붙여놓고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봉지로 깁스를 감싸고 화장실에서 샤워도 했습니다.
나잇값 못하고 그렇게 촐랑대던 제가 앉은뱅이 신세가 되니 몸이 먼저 알고 반응하대요. 참고 참던 눈 다래끼 수술차 안과엘 갔습니다. 공교롭게 엄청나게 눈이 쏟아지던 날이었습니다. 수술 후 왼발엔 깁스. 오른 눈은 애꾸. 중심잡기조차 어려웠습니다. 목발을 헛짚어 눈 위에 그대로 털썩. 혼자 일어서려 했지만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겨우 몸을 일으켰지만 이미 상태는 만신창이. 어쩌다 한 대씩 오는 택시는 속도를 줄였다가도 제 상태를 보고 그대로 쌩 지나치길 반복. 전쟁서 살아 온 상이용사 모습이 이 정도였을까요. 처절했습니다. 한참을 떨다가 올라탄 택시에서 기사가 ‘괜찮냐’고 묻는데 눈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문화관까지 차 안에서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습니다.
사실 대학원서도 술 마시고 노는 데만 앞장섰던 제가 그때 큰 결심을 했던 거 같습니다. “공부하자”. 진짜 열심히 했어요. 물론 세저리에 다니는 것만으로 저절로 내공은 쌓였지만, 다른 동료에 비해 저는 한참 뒤쳐졌었죠. 오죽하면 졸업시험까지 두 번이나 봤겠어요. 어쨌든 책 보는 것 외에 달리 할 게 없던 그때 환경이 저를 업그레이드 시켜준 요인이었던 거 같습니다.
선생님 편지엔 아름다운 봄날이 가득 담겼는데, 저는 제천하면 이 기억부터 떠올라요. 물론 제천영화제와 함께했던 습한 여름도, 유난히 짧아 더 아름다웠던 가을도 있지만요.
현직에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대학원이 생각납니다. ‘교수님들께 안부 전화를 드려야지’ 하면서도 쉽게 번호가 눌러지지 않았습니다. 통화로 죄송하다는 것 외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였을까요. 겉으로는 활발해 보이지만, 아무래도 저는 너무 소심쟁이입니다.
세저리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정말 정말 스승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갑자기...왜 5월 15일 분위기?^^) 처음엔 다들 생소하게 여겼었는데, 이제 부산에서도 우리학교의 명성이 자자해요. 뿌듯합니다. 선배들도 “스테디셀러(벼선사) 작가 아니냐” “국제신문 칼럼 쓰시던 제 교수님은 잘 계시냐”고 자주 물어요. 제 옆자리서 편집기자(인턴)로 일하는 인제대 학생도 자신의 학보사 선배도 이번에 세저리에 입학했다면서 큰 관심을 보였어요.
사회부에서만 3년을 꽉 채웠습니다. 15개 경찰서 가운데 9군데를 제가 맡았었네요. 신문사에서도 드문 사례입니다. 일을 잘해서이거나 너무 못해서이거나...둘 중에 하난데 일단 후자는 아니라고 여기며 자위합니다. 올 초부터 기획탐사부로 발령받아 일하다가 지금은 선거시즌 관계로 여차저차하여 편집부에 왔습니다. 신문제목도 뽑고 레이아웃도 짜고 하는 편집기자로 잠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뗏거리 걱정에, 낯선 취재원과의 술자리에 몸이 엉망이 됐었는데 규칙적인 생활로 매우 회복되고 있습니다. 입사 3년 만에 10키로 넘게 체중이 불었는데 3개월 동안 6, 7키로 정도 감량했어요.
아참. 4기 후배로 입사한 세희는 뉴미디어국 기자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단비뉴스에서 쌓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부산에 있는 동문을 제가 많이 챙겨야 하는데 사실 자주 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정식 모임이라도 하나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과 많은 선후배 동기와 함께 하는 대강막걸리와 바비큐 생각을 하니 정말 행복해지는데 아쉽게도 저는 12일에 참석할 가능성이 낮을 것 같습니다. 그날은 1년에 한 번뿐인 기자협회 체육대회인데 빠질 수가 없어섭니다. 작년 여름휴가를 제천에서 보냈고, 가을에 있었던 홈커밍데이에도 참석했지만 아쉽고 죄송한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선생님. 글을 적은 김에 하나 더 말씀드릴 게 있는데. 저 올 가을에 장가갑니다. 아마도 선생님께서 장교로 훈련받았을 때 쯤 진해에서 태어난 아가씨고요. 아버님은 해군 준위로 얼마전 퇴직하셨고, 가업(?)을 이어 막내 남동생이 지난 3월 해군사관학교에서 소위로 임관한 해군가족입니다. 배우자가 될 사람은 저보다 3살 어려 30살이구요. 부산의 한 구청 행정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제천은 물론, 여의도도 따라올 수 없는 ‘벚꽃명가’ 출신 커플입니다. 지난주 토요일 오전에는 경주집, 오후에는 진해집에 들러 부모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왔습니다. 상견례는 지난달 했구요. 결혼식은 10월 11일 낮 12시 부산서 예정돼 있습니다. 감히 초대를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글 워드를 켜놓고 ‘하이봉수’에게 전송할 글을 쓰고 있으니 더 옛날 생각이 납니다. 피투성이가 돼서 돌아올 그 초조함... 그래서 오늘도 창만 열어 놓고 깜빡이는 커서만 한참 바라봤는데....부산 사투리로 “마 그냥 썼습니다”...설마 첨삭 하실 건 아니죠...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세저리뉴스를 쓴다고 생각하고 생각나는 대로 써서 글이 엉망입니다. 근데 이런 게 정말 꾸미지 않는 진솔한 글 아닙니까. 허으허으허으하하(선생님 웃음소리 성대모삽니다.)
모쪼록 건강하시고요. 앞으로도 많은 AS(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한번 사제면 영원한 사제’라는 관계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해병출신 2기생 김화영이 부산에서 2014년 4월 8일 밤에 봉쌤께 썼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