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작
공지사항
<학과장 칼럼>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 > 아르누보 포스터 디자인 (월간 전시가이드 )
- 시각영상디자인학과
- 조회 : 1256
- 등록일 : 2023-06-15
기능과 미의 균형, 프랑스 아르누보 포스터
글 : 신희경 (세명대학교 시각영상디자인과 교수, 예술학박사)
디자인의 입장에서 가장 큰 경계는 기능성에 대한 고려 여부이다. 즉 일상에서 실제로 사용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탄생하여 그에 따른 사용성, 기능성에 대한 고려가 있는가 여부가 디자인인지를 결정짓는다.
디자인과 아트를 가르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유일무이한 작품이냐 아니면 복제생산 혹은 대량생산되었느냐일 수도 있고, 작가의 개인적 표출이냐 아니면 사용자를 포함한 사회 혹은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반영하였는가 등으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디자인의 입장에서 가장 큰 경계는 기능성에 대한 고려 여부이다. 즉 일상에서 실제로 사용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탄생하여 그에 따른 사용성, 기능성에 대한 고려가 있는가 여부가 아트와 디자인을 결정짓는다. 이러한 사용성, 기능에 대한 언급은 1800년대 영국에서 일어나 (art and craft 운동)에서 처음 명시화되었다.
디자인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모리스가 공예부흥를 호소하였을 때, 모리스의 진지한 자세에 공명하는 세대가 나타났는데, 그들 대부분은 모리스를 통하여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을 자각한 것이 계기였다. 1880년대에 들어서, 이들은 하나의 조류로 볼 수 있을 정도의 움직임이 되었으며, 이 조류는 광범위하게 (art and craft 운동)이라 불렀다. 이들이 내세운 것은 생활 환경 일체를 <用과 美>의 조화로운 상태로 정돈하자는 것이었다. 이 경우, <미>는 혼자 독립되어 활보하여서는 안된다.
그래서 미를 위하여, 미를 추구하는 경향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이 주어질 정도로, 사용성과 기능성에 대한 자각, 즉 디자인에 대한 자각이 시작되고 명문화되었다. 하지만 아직 그들은 어디까지나 크래프트, 예술이고 싶어 했고, 따라서 미술(아트)라는 명칭을 고집하였다. 이 후 당분간, 미술과 공에는 동일시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그 이후 art and craft에서 art and industry로, 즉 <미와 용의 조화>에서 <목적으로의 적합>으로 무게 중심이 쏠리면서, 예술과 디자인은 분리되기 시작하고 본격적인 디자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알퐁스 무하 등의 아르누보 시기의 포스터야 말로, 바로 디자인이 <용에 대한 적합>의 시기로 무게 추가 움직이기 직전, 아직 <용과 미의 조화>를 주장하던 시기의 대표이다. 즉 아르누보 포스터들은 아트의 영역에서도 논해지지만, 사실은 그래픽 디자인의 최초의 진화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시각적 정보전달이라는 기능과 조형, 즉 아름다움이 관련된 그래픽 디자인은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포스터에서 그래픽디자인의 최초의 진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회화 그 자체가 장식의 가능성을 지향하였다. 굵은 윤곽선이 화면에 도입되어, 평행이나 반복에 의해, 혹은 우아한 곡선을 그림으로서, 장식적 효과가 높아졌다. 명쾌한 평면 붓질의 수법도 더해졌고 장식은 상징과 겹쳐졌다. 당시의 화가들도 포스터에 흥미를 보였다.
사무엘 빙의 <아르누보> 가게에서 개최된 제1회 전시에는 프랑스 화가인 드니, 피에르 보나르Bonnard, Pierre (1867-1947), 폴 란손 등 나비파 화가가 얼굴을 내밀었다. 앙리 드 투르 =로트렉(Toulouse-Lauttrec, Henri de (1864-1901)도 참가하였다. 알려지다시피, 나비파는 고갱의 <장식>에 의해 이름지어진 그룹이다. 그들도 한편으로는 신비나 상징을 추구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장식을 일상주변의 미화를 향하는 것에 주력하였다. 회화의 평면성을 중시한 나비파의 화가들도 포스터 제작에 열중하였다. 앙리 투르즈 = 로트렉은 피엘 보나르에 자극을 받아, [무랑 루즈](1891)를 제작하였고, 이 작품은 첫 작품임에도 최고 걸작이 되었다.
이후 로트렉은 나비파 구성원과 함께 새로운 타입의 화가가 되었다. 이러한 화가들의 제작은 상업 활동의 하나인 포스터를 예술의 영역까지 높이는 것에 공헌하였다.
포스터 역사의 가장 앞에서 감미로운 로코코취미를 길거리에 가져온 쥬르 쉬레(Chèret, Jules1836~ 1932)가 위치매겨진다. 그는 최초로 다색석판을 사용하여 화려한 포스터를 탄생시켜, 근대 포스터를 구축하였는데, 젊고 활달한 근대적 인 여성을 그려서, 세상의 모든 것을 선전하는 수법이다. 그는 포스터가 대중의 심리를 잡고, 소비사회의 꿈과 동경을 조작할 수 있는 미디어임을 이해한 첫 번째 포스터 작가이기도 하다. 쉬레의 최대 공적은 포스터라는 장르를 확실하게 세상에 알린 것이다.
쉬레의 포스터가 로코코에 원천을 지닌다하며는 우제 그롯세(Grasset, Eugène(1841-1917))는 켈트나 고딕을 기반으로 하여, 거기에서 파생하는 장식감정에 의해 매력적인 포스터를 탄생시켰다. 1886년부터 포스터를 제작하였는데, 그의 작품풍으로부터 아르누보 포스터의 시작이라 본다. 그롯세 등의 작업에서는, 아르누보가 일시적인 유행현상이 아니었음이 차츰 명확해진다. 즉 그가 1897년에 저술한 『식물장식의 응용』, 1905년의 대저 『장식적 구성의 방법』 등에는 아르누보에 관한 깊이 있는 연구가 보여서, 그가 감미롭기만 한 감성적 작가가 아님이 드러난다.
알퐁스 무하(Alphonse Mucha (1860–1939)는, 순수하게 매혹적 포스터에 대한 자각을 일으킨 작가이다. 포스터 작가로의 데뷔작인 1895년의 르네상스 극단의 [지스몬다]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고, 그가 그린 관능적인 여성상에는 아르누보의 요소가 충분히 함축되어있다. 무하는 아르누보 건축물을 뛰어넘는 듯한 풍만한 곡선 양식으로, 고향 체코의 신비와, 회화를 배운 오스트리아 빈의 상징주의를 포스터에 그려넣었다. 무하가 고갱과 깊이 교류하였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가가 장식 속에 가져가고자 하였던 상징성이라는 또 다른 측면이 인식되어진다.
19세기 말의 프랑스 아르누보 포스터는 20세기에 들어와서 근대화와 함께하는 도시생활의 변화에 따라, 기계시대에 어울리는 합리적 정신의 방법론과 새로운 양식으로 전개하게 된다. 즉 <기능과 미의 조화>에서 <기능, 사용에의 적합>으로 모더니즘을 향하게 되면서, 장식에 대하여 배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어, 디자인 사 뒤편으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미를 추구하는 자세, 또 장식에 대한 욕구는 근원적인 것이기에 영원히 사라질 수는 없는 표현이다. 그렇기에 1960년대 이 아르누보 양식은 다시 새로운 형식으로 재등장 부활하게 된다. 오늘날과 같이 아무리 디지털과 IT가 발달한 시대에서도, <기능과 미의 조화>라는 디자인의 경계선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 담당부서 : 시각영상디자인학과
- 담당자 : 신희경
- 연락처 : 043-649-1647
- 최종수정일 : 2024-10-26